제 중고등학교 시절 도파민을 책임졌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가십걸 시즌1입니다. 저는 공부를 꽤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는데, 이상하게 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제 공부의 원동력처럼 느껴졌습니다. ‘영어공부 한다’는 핑계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맨해튼 상류층 10대들의 화려한 삶과 복잡한 관계에 푹 빠져 있었죠.
2007년 첫 방영 이후 6개 시즌까지 제작된 이 드라마는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를 배경으로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의 사랑과 배신을 다룹니다. 지금 다시 보니 그때만큼 자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빠져드는 힘이 있더군요. 그 시절 제 방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한 편씩 보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블레어와 세레나, 우정과 배신 사이의 긴장감
가십걸의 중심에는 블레어 월도프와 세레나 반 더 우드슨이 있습니다. 블레어는 완벽한 상류층 소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불안과 집착이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반대로 세레나는 자유롭고 매력적이지만 늘 사건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제가 학생 때 가장 충격받았던 장면은, 블레어의 남자친구 네이트와 세레나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설정이었거든요. 고등학생이 교복을 입고 사랑과 배신, 바람과 갈등을 겪는다는 설정 자체가 꽤 자극적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게는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강한 도파민이었죠. 현실 교실 안에서도 없었던 일이구요.
하지만 단순히 자극적인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블레어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소녀입니다. 세레나 역시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가족 문제와 동생의 우울증이라는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흔들리는 청춘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댄 험프리와 척 배스, 계급을 넘어선 사랑과 욕망
댄 험프리는 브루클린 출신의 ‘아웃사이더’입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상류층 문화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이죠. 세레나와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계급을 넘어서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보니 이 구조가 꽤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척 배스. 시즌1에서는 솔직히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블레어와의 케미스트리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드라마의 또 다른 축이 됩니다.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결핍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십걸의 묘미는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입니다. 누가 누구와 사귀었는지,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지, 그리고 익명 블로거 ‘가십걸’이 그 모든 걸 폭로합니다. 지금 다시 보면, 이 설정은 오늘날의 SNS 문화와도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사생활이 언제든 공개되고,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는 구조 말입니다.
뉴욕에서 다시 만난 가십걸
작년에 남편과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저희 부부 모두 학창시절 가십걸을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세레나가 처음 등장했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방문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 서서 남편과 함께 “XOXO, 가십걸 히얼~” 하고 흉내를 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물론 세레나처럼 우아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비슷한 포즈로 사진도 찍었죠. 터미널 내부는 웅장했고,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드라마 속 장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에서 바나나 푸딩도 먹고, 써밋 전망대에 올라 맨해튼 전경을 내려다보며 “우리가 저 드라마를 보며 자랐구나”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청춘물이 아니라, 제 학창시절의 일부였다는 걸요.

가십걸은 단순한 막장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면 화려한 상류층 청춘 드라마입니다. 명품, 파티, 배신, 스캔들. 하지만 다시 보니 각 인물의 상처와 성장 이야기가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블레어의 불안, 세레나의 방황, 네이트의 부모 갈등, 척의 인정 욕구까지. 완벽해 보이는 아이들도 결국은 불완전한 청소년이었습니다.
한국 드라마와는 확실히 다른 개방적인 소재가 당시엔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교복을 입은 채 키스신이나 베드신이 등장하는 설정은 어린 제게 꽤 충격적이었죠. 하지만 그 자극이 있었기에 더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십걸 시즌1은 총 18부작입니다. 다시 정주행할 생각입니다. 뉴욕 신혼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 시절의 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요. 드라마를 보다 보면, 맨해튼의 화려한 스카이라인보다 제 방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몰래 보던 고등학생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XOXO, 가십걸.